갤러리 브레송 기획초대전 - Look Back in Anger 6
January 9, 2023최치권論 :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표현의 문제
이광수(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가 최치권은 썩고 타락한 한국 정치, 불합리와 모순투성이인 한국 사회를 사진으로 욕하고, 침 뱉고, 조롱한다. 스스로 말하기를 이 시대를 목격했으나, 증언할 용기가 없어서 사진으로 싸지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치권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 바깥에 있는 어떤 무엇이다. 보이는 것을 카메라를 통해 재현한 이미지인데, 흔히들 말하는 객관의 모습은 아니고 사진가가 자의적으로 변형 혹은 왜곡하여 만든 이미지다. 그렇다고 사진가가 직접 개입하여 마치 카메라를 화가의 붓이나 문인의 펜으로 삼아 창조해낸 것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 이미지로 드러난 그 모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촬영하기 전에 카메라를 설정하여 보정을 했든, 촬영하고 난 뒤 원본의 이미지를 보정 해서 만들어냈든, 과하다 싶을 만큼의 보정 단계를 거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지에 재현된 그 장면이 실제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분명히 사진이라고 정의하는 이미지의 범주 바깥에 있지는 않다.
그러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사진가는 거리 곳곳을 도시의 사냥꾼처럼 돌아다니며, 그러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장면을 선택했다. 분명히 선택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편향의 선택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 인물은 아주 적고, 대부분이 이미지, 마네킹 등이거나 실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오브제와 심하게 섞거나 감추거나 확대해 원 형상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든 이미지들이다. 사진가는 왜 이렇게 재현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진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현실의 물리적 세계가 아닌 그에 대한 해석의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위해 카메라와 컴퓨터로 만들어낸 이미지들을 모아 조(組)를 짜고, 그 사이 사이에 뭔가 독자가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배치한다. 그 추상의 모습은 여지의 공간이다. 사진가가 때때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열어줌으로써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의 권한 일부를 화자가 아닌 청자에게도 넘기는 작은 시도다. 그러니, 최치권 사진 작품의 근간은 한 장, 한 장 이미지가 갖는 조형성에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두드러지는 것이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여러 장으로 제시된 조 안에서 각각의 이미지끼리 조화와 충돌을 통해 제3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이, 사진에서의 내러티브의 힘이다. 전혀 다른 시공간의 맥락에서 사진가의 자의에 따라 채집하여 가져와 새로운 의도로 전유하면서 만들어내는 그 내러티브의 힘이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건 사진가가 짠 조를 통해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갖는 내러티브의 힘도 있다. 이 점에서 최치권 사진을 보면, 가장 두드러지는 성격은 회화적이라는 것이다. 일단, 이 글에서 말하는 ‘회화적’이라는 것은, 형태, 구도, 색채, 명암, 질감 등을 통해 표현력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해석은 최치권의 사진이 얼마나 ‘사진적’인가 라는 질문으로도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진적’이라 함은 규정하는 사람에 따라 달리 규정될 수 있겠지만, 대략 그것들을 정리해보면,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사진이라는 것은 카메라 앞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를 빛을 이용하여 기계로 잡아내어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니, 어떤 객관적 사실의 정보를 제공해주는 자료가 된다. 다음으로 그 이미지 안에는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실체의 의미도 물론이지만, 때로는 분명하게, 때로는 불분명하게 드러나는 사회 안에서의 상징의 문화적 코드로서 의미도 갖는다. 마지막으로, 그보다 더 ‘사진적’인 것은 이러한 두 가지의 의미 너머에서 작동하는 전혀 객관적이지도, 전혀 대상적이지도, 전혀 코드적이지도 않은 철저히 개인적인 어떤 메타 감정과 같은 것을 자아내게 하는 감정의 수원지와 같은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 세 번째의 감정은 너무나 우연에 따라는 것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것이어서 어떤 어휘로 규정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는 존재인데, 개인에 따라 이질적이면서 중층적이고 때로는 아무에게도 공감받을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이를 두고, 바르트는 푼크툼이라고 했는데, 이를 벤야민식으로 풀면 아우라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성격을 기준으로 볼 때, 최치권의 사진은 첫 번째 성격은 아주 약하고, 두 번째 성격은 매우 강하고, 세 번째 성격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사진가가 객관적인 모습을 심하게 변형하여 그 안에서 자신의 의도와 규정을 독자에게 강제하기 때문에 독자가 대중적인 문화 코드로는 이해하지만, 그것을 자기식으로 해석하거나 감정을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바깥세상에, 한때나마, 존재했던 그러나 지금은 부재함으로써 느끼는 상실의 감정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다. 회화적으로 조형을 구성하다 보니, 마치 광고 영상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 같다. 사실성도 없고, 아우라나 푼크툼도 없고, 상징 의미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힘이 강하고, 그것을 대중의 감각에 어필하여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려 하는 이미지다.
사진의 역사를 보면, 사진은 회화와의 관계 설정을 하는 과정에서 소위 ‘사진적’이라 하는 것을 찾아왔다. 사진은 그 타고난 성격상 회화와 완전히 결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둘 다 평면상에 색채와 점과 선과 면을 사용하여 형상을 나타내고 그를 통해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제시하는 조형 예술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회화는 화면의 구성을 주체적으로 만들고 그것이 회화의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사진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전적으로 다르다. 회화는 화면 구성의 측면에서 볼 때, 배치의 예술이다. 거기서는 배치되는 것들 사이에 화가의 의도로부터 나오는 어떤 질서가 있다. 그렇지만, 사진은 그럴 수 없다. 사진은 이미 제시된, 즉 presentation 되어 있는 어떤 실체를 평면 위에서 재제시representation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은 어떤 실체를 사진가의 의도대로 넣거나 빼거나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구도라는 말이 사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최치권의 작업은 구성/구도의 면에서나 보정을 통한 표현의 면에서나 대상을 왜곡하여 만들어낸 창의적인 이미지를 통해 매우 회화적이면서 그 위에서 그 이미지들을 묶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매우 강한 작업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의 강한 회화성과 뛰어난 내러티브를 통해 사진가는 한국 정치에 대한 보이지 않는 힘을 드러낸다. 사진은 사실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지만, 그 재현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힘인 경우가 많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기록보다 문학의 성격이 강해지는 것은 바로 최치권의 경우와 같이 겉의 모습, 객관적인 성격을 재현하는 것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포착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다. 그래서 최치권의 변형은 여전히 이성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감각의 세계에 속하는 예술의 경지까지는 아직 아니다. 사진가 최치권이 카메라와 컴퓨터를 통해 적극적인 표현의 힘을 빌려 외형을 변형시키거나 아예 해체해버림으로써 새롭게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진의 세계를 열 수는 있다. 그런 이미지를 누군가가 어떻게 이해하고, 가치를 매기는 것은, 그들 몫이다. 사진가는 어느 정도까지, 어떤 방식으로까지 갈 것인지만 고민하면 될 일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드러내는 것은 사진의 그 본질적 성격에 의해 소프트웨어든 하드웨어든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과감한 표현을 대동하지 않으면 매우 어렵다. 사진에서 표현력이라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일반적 사고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 카메라에 내장된 선(先)보정 장치를 통해서 보정을 하나, 소프트웨어의 힘을 빌려 후보정을 하나, 그 보정이라는 것의 허용 범주는 정해져 있지 않다. 흔히들 말하듯, 있는 것을 없애버리거나 없는 것을 만들어내 넣는 것은 사진photography이 아니고, 디지토그라피digitography라고 하는 규정을 받아들인다면, 최치권의 사진은 분명 사진이다. 그것도 세상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어떤 시각이 존재하고, 그것으로 세계를 기록하는 성격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 이런 규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 분명히 맞다. 다만, 카메라에 존재하는 원본이 - 이런 게 가능한 지도 모르겠지만 – 최종 출력되어 나타난 프린트 이미지와 너무나 다른 그 이미지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그것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가진 자기 기준의 예술에 대한 시각에 따를 일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작품성을 매기는 일은 어불성설이라 본다. 사실성과 해석의 여지 그리고 다른 어떤 기록이나 예술에는 존재할 수 없는 푼크툼이라는 ‘나만의’ 슬픈 찔림을 어떤 기준으로라도 일정하게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진이 더 ‘사진적’인가, 라는 물음에 답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가장 사진적인 사진은 바르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존재할 수 없고, 자신에게만 슬픈 찔림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끝까지 공개하지 않은 그 죽은 어머니의 다섯 살 소녀 때 찍은 그런 사진을 말한다면, 너무 규정적인가? 사진은 지나가 버린 과거를 담고, 그래서 기억을 통해 부재하는 것과 현존하는 것을 이어주는 것, 대상을 식별하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 ‘사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러한 평가가 사진에만 존재하는 슬픈 찔림, 푼크툼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최치권 사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사진의 경계를 넘어 회화의 세계로 들어간 사진, 예술로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형식을 빌려 ‘사진적’이라 함을 파괴하는 사진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